시간 탐험대 - 1990년의 야구 그리고 대중문화

2013. 12. 26. 01:45Sports BB/야구라

728x90
반응형

2007년 3월 22일, 필자는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굵은 제목의 한줄 기사에 눈을 뗄 수 없었다. 90년대 초,중반 롯데 자이언츠의 에이스로 활약하며 입단 당시만 해도 최동원,선동열의 대를 이를 대형 투수로 주목 받았지만, 결국 미완의 대기 에 머무른 채 야구생활을 접어야 했던 박동희가 교통 사고로 이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프로 무대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 아픔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가버린 그에 대한 아쉬움이 깊어만 갔다.


그 후로 1년이 지난 2008년 3월 11일 이번에는 세상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불미스러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해태 타이거즈 4번 타자 출신의 이호성이 한강에 스스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생을 마감한 것이다. 팀의 주장으로서 그리고 선수협의 회장직을 수행하면서 리더십을 발휘했던 그가 화려했던 프로생활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으로 불미스러운 사건에까지 휘말리게 된 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2008년 10월 2일, 오전 정말 믿기지 않는 뉴스가 각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긴급으로 등장한다. 90년대 대한민국에서 국민 여동생으로서, 국민 누나로서 대중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받으며 대중문화 아이콘으로 자리 매김했던 배우 최진실이 자신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보도 였다. 거짓말처럼 느껴지며 순간 소름이 돋을 만큼 충격적이었던 이 뉴스는 사건 이후 며칠간 관련 기사가 봇물처럼 쏟아지며 대한민국을 큰 충격으로 몰아 넣는다.

 

박동희, 이호성, 최진실... 도무지 닮은 구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이 세사람에게 공통분모가 한 가지 있다. 바로 1990년을 기점으로 프로야구와 연예계에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던 이들이다. 박동희는 프로야구 입단 당시 역대 최고의 입단 계약금을 받으며 세간의 화제를 모았으며, 이호성 또한 당대 최강팀 타이거즈 타선의 세대교체의 선봉장으로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 최진실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만큼 90년 대중문화에 신드롬을 몰고온다.


1990년 야구와 대중문화에서 위의 세 사람들의 이름은 반드시 거론해야 할 만큼, 슬픈 이야기들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1990년 프로야구와 대중문화 되새김은 다시 한 번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시작하고자 한다.


많은 이슈와 화제거리를 몰고 다니던 1989 시즌은 역대 최다인 2,883,669명의 관중을 동원하며 국내 최고의 인기 스포츠임을 입증하였다. 1990 시즌을 앞두고 그 어느 해 보다도 출중한 기량을 갖춘 기라성 같은 우량 기대주들이 대거 입단하게 된다. 해태의 이호성, 정회열, 태평양의 김경기,삼성의 이태일, LG의 김동수, 이병훈, 롯데의 박동희 등이 대표적인 선수들이다.

 

 

 


특히 롯데의 박동희는 부산고 시절 봉황대기에서 전무후무한 평균자책점 0의 대기록을 남겼고, 고려대에 진학해서도 줄곧 에이스로 활약하며 이미 프로 입단 전부터 최동원-선동열의 대를 이를 거물투수가 될 것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그의 프로 입단 과정도 큰 화제를 모았다.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 입단설이 나돌면서 과연 그가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것인가도 큰 관심거리가 되었지만, 결국 그는 당시 최고 계약금인 1억 4천만원을 받고 고향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한다.


150km대의 강속구를 거침없이 뿌려대는 새로운 거물투수의 등장은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그가 입단 후 처음으로 등판한 사직구장에서 펼쳐진 태평양 돌핀스와의 시범경기는 당시 MBC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기도 하였다. 정규시즌도 아닌 시범경기가 전국 방송을 통해 중계가 된 것은 1980년대 초반 프로야구의 초창기 시절을 제외하곤 유례가 없던 일로서 당시 박동희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식경기 데뷔전이었던 4월 11일 대구 삼성전에서 그는 4회부터 구원 등판하여 무려 10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화려한 데뷔전을 치르게 된다.


1989시즌 기대이상의 선전으로 창단 최초로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는 경사를 누렸던 태평양은 팀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장타력을 메워줄만한 인천 프랜차이즈 사상 최고의 슬러거를 입단시키며 내친 김에 우승도 노려볼만 하다는 야심을 품게 된다. 바로 인천고-고려대를 거쳐 태평양에 입단한 김경기였다.


김진우-김동기 이후 변변한 거포가 없어 늘 공격력의 부재를 실감했던 돌핀스는 김경기에게 당시로선 상당히 높은 금액인 계약금 6,000만원을 지불하며 높은 기대감을 표시한다. 김경기는 83시즌 삼미 슈퍼스타즈의 감독으로서 팀을 한국시리즈 진출 직전까지 이끌며 돌풍을 일으켰던 김진영 전 감독의 아들로서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 공교롭게도 90시즌을 앞두고 아버지 김진영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의 신임 감독으로 임명되어 부자가 나란히 프로무대에 선을 보이게 된다.


광주일고-연세대 출신의 강타자 이호성은 데뷔 첫 해 김성한,한대화,이순철,김종모,박철우 등 쟁쟁한 스타들이 포진하고 있던 타이거즈 타선의 주전 자리를 꿰차고 한대화에 이어 팀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율을 기록한며 좋은 활약을 펼친다.


영남대 4학년 재학 당시 아마야구 최다승(9승)을 기록한 잠수함 이태일 또한 라이온즈의 허약한 선발투수 진에 큰 몫을 해줄 투수로 기대를 모은다. 전반기에는 부상등으로 인해 대부분의 경기를 거르며 3패의 부진한 성적에 그치지만 후반기부터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신인으로서는 사상 처음으로 롯데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13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한다.


90시즌 최고의 신데렐라는 LG트윈스의 김동수였다. 서울고-한양대를 졸업하고 4,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트윈스에 입단한 그는 백인천 감독의 조련 속에 부쩍 성장을 거듭하며 심재원,서효인 등을 제치고 트윈스의 안방마님 자리를 꿰찬다. 0.290의 타율, 13홈런 62타점의 호성적을 기록한 그는 포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신인상을 받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90시즌을 앞두고 프로야구 무대에 새로운 변화가 생기게 된다. 굴지의 대기업인 럭키금성이 MBC 청룡을 130억원에 인수하고 LG 트윈스 라는 팀명으로 프로야구 무대에 뛰어든 것이다. 럭키금성의 그룹 영문명인 Lucky Goldstar에서 앞글자를 따와 LG라는 팀명에 기업본사가 있는 여의도 트윈빌딩에서 착안한 트윈스라는 명칭으로 팀명을 정하였는데, LG라는 형태의 축약적인 이니셜은 당시로선 보기 힘든 신선한 네이밍이었다. 결국 야구단의 90년대 초반 폭발적인 인기몰이는 아예 그룹명 자체를 95년부터 LG로 바꾸게 되는데 큰 몫을 담당한다.


초대 감독은 원년 MBC 청룡 감독이었던 백인천氏을 임명하게 된다. 백인천 감독은 허약한 선발진을 보강하기 위해 당시 팀내 최다 홈런 타자였던 김상호를 OB의 최일언과 맞바꾸는 깜짝 트레이드를 단행한다. 또한 돌핀스의 잠수함 투수 김신부를 새로 영입한다. 당시 백인천 감독의 선발투수 운용 계획의 중심에는 최일언, 김신부 두 명의 재일교포 투수가 자리하고 있었다. 백인천 감독은 이 두 명의 재일교포 투수들에게 총 25승 정도를 기대했는데 정작 두 명의 투수가 거둔 최종 승수는 합계 5승, 기대치의 20%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잘 되는 팀에는 한 두명의 미치는 이른바 몬스터 시즌 을 보내는 선수가 등장하기 마련인데, 투수진에서는 김태원과 문병권이 그 역할을 해냈다. 86시즌 입단 당시 빠른 볼을 지녀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89시즌까지 4시즌 동안 고작 4승 밖에 거두지 못했던 김태원은 90시즌 그야말로 백조로 거듭나게 된다. 팀내에서 가장 많은 193 이닝을 던져 18승 5패 평균자책점 2.51을 기록, 다승 2위, 평균자책점 4위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트윈스의 에이스로 자리매김한다.경북고 전성기의 주역이었던 문병권도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두 자리수 승수(10승)를 기록하며 팀내 선발진에서 큰 몫을 담당한다.


기존의 김용수와 정삼흠은 서로 보직을 맞바꾸는데 결과는 대박이었다. 선발투수로 전환한 김용수는 특유의 면도날 제구력과 과감한 승부패턴으로 12승 5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2.04의 호성적을 거두고 마무리로 변신한 정삼흠 역시 안정된 투구를 선보이며 8승 9패 23세이브로 입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기록하며 트윈스의 뒷문을 철저히 단속한다.


89시즌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했던 팀 컬러의 MBC 청룡의 주축 선수들은 트윈스로 유니폼을 갈아입자 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호쾌한 야구를 선보인다. 백인천 감독의 소위 혼의 야구 로 무장한 이들은 빠른 기동력과 호쾌한 타력으로 서울의 야구팬들을 열광시킨다. 팀 도루 140개로 7개 구단 중 최다를 기록하는데 특정 선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도루 능력을 갖춘 선수들이 포진한 결과였다. 나웅(18개), 박흥식(16개), 민경삼, 김동수 (이상 15개), 김재박 (14개), 이광은(11개) 등 무려 6명의 선수가 두 자리수의 도루를 기록하며 뛰는 야구를 선보였다. 공격에서는 검객 노찬엽(타율 0.333, 타점 51), 미스터 LG 김상훈(0.322, 타점 58), 신인 김동수 (0.290, 13홈런, 62타점) 등이 중심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결국 트윈스는 정규시즌 71승 49패의 성적으로 팀 창단 이후 최초로 정규시즌 1위에 등극하는 감격을 누리게 된다. 성적이 좋으니 자연히 관중들도 잠실구장에 밀물처럼 밀려오기 시작하는데 프로야구 구단 사상 최초로 정규시즌 총 관중 70만명을 돌파(768,329명) 하는 기염을 토한다. 최초로 치어리더를 도입하여 새로운 응원문화를 선도하고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의 구단 팡파레 송 도입 등을 통해 야구장에 찾아오는 관중들에게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한 트윈스의 프로야구 첫 무대는 블록버스터급 대박이었다.


90년 정규시즌 총 관중은 로을 일으킨 LG와 박동희라는 거물신인의 입단으로 기대치가 높아진 부산 팬들이 시즌 초반 사직구장에 몰려든 덕분에 당시 구단 창단 이후 최다관중(654,950명)을 동원한 롯데 자이언츠 등에 힘입어 최초로 300만명을 돌파(3,189,488명)하며 300만 관중시대 를 열어젖히게 된다.


90년 포스트 시즌은 LG 트윈스, 해태 타이거즈, 빙그레 이글스, 삼성 라이온스 이렇게 4팀이 올라 자웅을 겨루게 된다. 빙그레와 삼성의 준플레이오프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가 정규시즌 막판에 3위로 미끄러진 이글스였지만 그래도 객관적인 전력에서 라이온즈보다 우세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차전에서 준플레이오프의 사나이 성준의 절묘한 템포피칭을 앞세운 라이온즈가 이만수의 결승포에 힘입어 2-0으로 서전을 장식한다. 대구에서 펼쳐진 2차전은 더욱 극적이었다. 9회말까지 4-3으로 뒤진 라이온즈의 공격, 선두타자 김용철이 한희민으로부터 극적인 동점홈런을 쳐내면서 대구구장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든다. 강기웅이 범타로 물러나고 1사후 등장한 이만수는 한희민으로부터 끝내기 역전 홈런을 터뜨리며 극적으로 승부를 끝낸다. 1,2차전 연속으로 결승포를 쳐낸 이만수는 공격진에서 일등공신의 역할을 해낸다.


당대 최강팀 해태 타이거즈와 플레이오프에서 맞붙게 된 라이온즈의 기세는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몰랐다. 양팀은 잠수함 투수 이강철과 이태일을 선발로 등판시키는 데 선발투수진의 비중으로 볼 때 타이거즈의 우세가 점쳐지는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이태일은 초반부터 매회 주자를 내보내며 불안하게 경기를 이끌고 가지만 간신히 실점을 막아내는 반면에 이강철은 3회까지 라이온즈 타선을 철저하게 봉쇄한다. 운명의 4회초 라이온즈의 이현택이 이강철로부터 2루타를 치고 나가자 해태 김응용 감독은 즉시 필승카드 선동열을 호출한다. 다소 성급해 보였던 이 투수교체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온다. 후속타자로 등장한 김용국이 선동열로부터 선제 투런 홈런을 터뜨린 것이다. 예상치 못한 카운터 펀치에 타이거즈는 당황한 듯 이후 이태일의 기교 피칭에 철저하게 농락당한다. 김용국은 이어 7회 공격에서도 2-1로 불안한 리드를 지키고 있던 상황에서 다시 한번 선동열을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쳐내며 선동열을 넉아웃 시킨다. 혼자서 4타점을 올리는 김용국의 깜짝 활약과 이태일-김성길의 절묘한 계투작전에 힘입어 라이온즈는 적지에서 1차전을 따낸다.


2차전은 더욱 극적으로 승부가 연출되었다. 중반까지 5-3으로 뒤지던 타이거즈는 장채근과 홍현우의 홈런에 힘입어 승부를 7-5로 뒤집는 저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포스트 시즌에서 이미 크레이지 모드로 돌변한 라이온즈는 승부를 매조지하기 위해 전날에 이어 다시 등판한 선동열을 상대로 이번에는 김용철이 극적인 동점 투런 홈런을 터뜨리며 승부를 연장전으로 이끌고 간다. 천하의 선동열이 이틀 연속으로 홈런포를 허용한 것은 처음인 만큼 타이거즈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연장 11회초에서 김용철의 희생플라이로 결승점을 뽑은 라이온즈는 적지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2연승을 따내며 기선을 완벽하게 제압한다. 고졸 2년차로서 89년 입단 당시 제2의 김시진 으로 큰 기대를 모은 삼성 김상엽은 90시즌 마티 코치의 조련과 룸메이트로 함께 있던 최동원의 멘토링을 통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게 된다.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구원 등판한 그는 선동열과의 맞대결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상대 강타선을 완벽하게 틀어 막는다.


대구에서 펼쳐진 3차전은 이미 기세가 오를대로 오른 라이온즈의 5-2 승리로 막을 내린다. 아무도 예상 못한 파죽의 3연승을 거둔 라이온즈는 87시즌 이후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 재계 라이벌 LG 트윈스와 대망의 한국시리즈를 치루게 된다. 당대 최강으로 지목되던 빙그레와 해태를 상대로 파죽의 5연승을 거둔 라이온즈의 우세가 점쳐지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한국시리즈 1차전부터 보기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성준과 김용수의 선발 맞대결로 잠실에서 펼쳐진 한국시리즈 1차전. 트윈스의 타선은 초반부터 성준을 공략하며 무려 7점을 뽑아내며 일방적인 경기흐름으로 몰고 간다. 90년 10월 24일 한국시리즈 1차전은 라이온즈 팬들 뿐만 아니라 부산 야구팬들, 아니 한 투수를 좋아했던 이들에게 적지않은 충격과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해준 경기이기도 하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전설의 4승을 거둔 최동원이 당시 4승을 거둔 상대였던 라이온즈의 유니폼을 입고 6년만에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서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임무는 선발이 아닌 패전처리 였다. 경기 직전 감독 인터뷰에서 당시 라이온즈 감독이었던 정동진 감독은 최동원의 활약을 기대하는 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단호하게 "별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나름대로 노장 투수에 대한 일종의 배려차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때 한국 야구를 주름 잡았던 대투수가 박빙의 상황도 아닌 승부가 일방적으로 기운 상황에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은 모습은 너무나도 씁쓸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결국 그 등판이 그의 화려하고도 굴곡이 많았던 선수인생의 마지막 등판이 되고 말았다.


1차전 13-0의 일방적인 승부와는 달리 2차전은 90년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던 경기였다. 라이온즈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경기였다. 박승호의 2타점 활약과 선발 김성길의 호투에 힘입어 2-1로 앞서가던 라이온즈는 9회말 아웃카운트를 단 한개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에이스 김상엽이 김영직에게 통한의 동점타를 허용하며 승부는 연장으로 접어들게 된다. 연장 11회말 트윈스의 선두타자 이병훈은 구원 등판한 이태일을 상대로 좌익선상 2루타로 공략하며 승부의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결국 루를 가득 채운 상황에서 9회말의 히어로 김영직은 정윤수를 상대로 극적인 밀어내기 결승점을 뽑아내며 승부를 마무리 짓는다.


2차전 이후 승부의 추는 급격하게 트윈스 쪽으로 기울고 3차전, 4차전은 트윈스의 일방적인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파죽의 4연승으로 트윈스는 창단 첫 해 페넌트레이스와 한국시리즈를 휩쓰는 돌풍을 일으킨다. 80년대 결정적인 고비마다 발목을 잡았던 이글스, 타이거즈를 가볍게 무너뜨린 라이온즈는 재계 라이벌 트윈스의 벽을 넘지 못하고 다시 한 번 지긋지긋한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시리즈 완패의 충격파로 인해 라이온즈 정동진 감독은 팀을 준우승에 올려놓고도 해임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라이온즈의 우승 조급증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방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많은 볼거리와 예기치 못한 반전이 가득했던 90년 프로야구는 300만 관중 시대를 여는 성과를 거두며 막을 내리게 된다.


대중문화에서도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고 기념비적인 기록도 수립된다. 서론에 이미 거론했지만 90년 한국 대중문화 최고의 스타는 최진실이었다. 89년말 모 전자 비디오 CF에 등장하여 깜찍한 모습으로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멘트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은 최진실은 기존의 스타들이 영화나 드라마의 성공을 발판삼아 CF에 등장하게 되던 관행과는 달리 CF에 보여준 이미지를 통해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이고 영화와 드라마로 활동영역을 높인 첫 번째 사례였다. 최진실의 인기몰이는 영화 남부군 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지영 감독 안성기,최민수, 최진실 등이 공연한 빨치산을 소재로 한 영화 남부군 은 대한극장에서 6월 2일 개봉하여 서울관객 324,169명을 동원하여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인지도도 높았지만 최진실을 보러 온 관객들의 비중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1990년 6월 극장가에는 한국영화 대작 3편이 나란히 개봉하게 된다. 여름방학 시즌을 앞두고는 주로 헐리웃 대작영화나 홍콩영화들이 대거 내걸리던 것과는 달리 당시로선 이례적인 일이었다. 신상옥 감독의 복귀작이자 KAL 858 사건을 다룬 마유미 (피카디리 극장 개봉),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 (단성사 개봉)과 남부군 (대한극장 개봉) 인데 이 중 마유미 만 아쉽게 흥행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70년대 액션영화를 심심치 않게 제작했던 임권택 감독은 모처럼 액션 장르로 복귀를 하는데 일제시대 종로의 뒷골목을 주름잡았던 김두한의 젊은 시절을 다룬 장군의 아들 을 찍게 된다. 영화의 주연배우들을 공모를 통해 뽑은 신인들로 기용하는데 우려와 달리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박상민,신현준,김승우,이일재 등이 이 영화를 통해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90년 6월에 개봉한 장군의 아들 은 11월까지 장기 상영되며 서울에서만 678,946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77년 장미희, 신성일 주연의 겨울여자 가 세웠던 한국영화 최다 관객 동원기록(58만명)을 넘어선다.


브라운관에선 청춘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 의 인기가 절정에 달하였다. 당시 출연한 손창민, 최수종, 이미연, 이상아 등은 청춘스타로서 상한가를 치게 된다. 특히 최수종-이미연 커플은 젊은 세대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는데 그들이 등장할 때마다 배경음악으로 등장한 김지연의 찬바람이 불면 도 덩달아 인기를 끌며 각종 가요 차트 상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상반기에는 KBS의 사랑이 꽃피는 나무 가 있었다면 하반기에는 MBC의 우리들의 천국 이 청춘드라마의 인기 계보를 이어간다. 홍학표, 배종옥, 최진실 등이 출연한 이 드라마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최진실이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역할로 등장하여 많은 청소년팬들의 눈물샘을 쭉 빼놓는다.


버라이어티 쇼 부문에서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의 시도가 단연 돋보인다. 김병조가 등장하던 80년대 초반의 이후 다소 정체되던 모습을 보이던 이 프로는 주병진을 내세워 당시 쟈니윤 쇼 가 일으킨 토크쇼 장르에 꽁트의 개념을 혼합하여 토크 개그라는 새로운 장르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다. 주병진의 재치 넘치는 진행과 더불어 노사연,이경규,김흥국 등의 고정 게스트들은 메인 MC 못지 않은 걸출한 입담과 재치로 프로그램 인기가도에 큰 몫을 한다.


90년 상반기 수줍음 가득하고 앳된 얼굴의 가수가 섬세한 가창력으로 가요계를 평정한다. 당시 최고의 작사가 박주연과 작곡가 하광훈이 제작한 사랑일 뿐이야 를 통해 김민우는 90년대 상반기 가요계 최고의 스타로 깜짝 등장한다. 사랑일 뿐이야 에 이어 입영열차 안에서 , 휴식같은 친구 등 연달아 3곡을 히트시킨 그는 열광적인 인기를 뒤로 한 채 군입대를 하게 되어 다시 한 번 팬들을 놀라게 한다. 그의 두 번째 히트곡 입영열차 안에서 는 그의 상황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 하다. 많은 청년들이 군대 가기 전 주제곡처럼 부르게 되는 노래로 자리하게 된다.


90년 보라빛 향기 로 데뷔한 강수지도 많은 남자 중,고생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었다. 오랜 미국 이민 생활을 청산하고 배우 송승환의 매니지먼트 하에 전격 데뷔한 그는 마치 순정만화에 등장할 것 같은 청순가련형의 이미지로 뭇 남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게 한다. 이선희, 정수라 등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여가수들이 대세였던 상황에서 요정같은 이미지 의 강수지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90년대의 첫 서막을 알린 90년의 프로야구와 대중문화는 많은 변화와 신선한 돌풍들이 넘쳐나던 한 해였다. 오랜만에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를 들으며 이번 주의 시간탐험을 마치고자 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