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탐험대 - 1989년의 야구 그리고 대중문화

2013. 11. 27. 01:02Sports BB/야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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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당시 중학생이던 내게 처음으로 개인용 라디오가 생겼다. 라디오를 켜면 항상 고정시키던 채널이 있었다. 다름아닌 95.9MHz MBC 라디오. 왜 유독 95.9? 오후 10시 10분만 되면(뉴스와 날씨 안내에 10분이 할당되었다.) 귀에 익숙한 시그널 뮤직과 함께 DJ 이문세의 감미로운 목소리 “별이 빛나는 밤에” (이하 별밤) 별밤은 당시 청소년들에게 하나의 아이콘이자 우상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항상 습관처럼 들리는 온라인 카페나 블로그처럼 별밤 마구간에서 청소년들은 자신의 노래실력을 뽐내고, 자신의 사연을 엽서에 실어 올리고, 매주 일요일 밤만 되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들의 생음악을 들으면서 녹음도 하고 별밤지기의 쟈니윤보다 더 재치있는 토크쇼에 흥겨워하곤 했다. 그러기에 라디오를 켜면 습관적으로 아니 이미 95.9에 주파수가 맞춰져 있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95.9MHz의 단골손님이 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가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우연히 라디오를 켜니 흘러나오는 박력이 넘치는 야구 캐스터의 목소리…잠시만 듣고 꺼야지….아니 5분만, 아니 10분만 결국 경기를 끝내는 차임벨이 울리게 될 때까지 모든 중계를 듣게 되고, 하지만 이 중계를 대놓고 들을 수 없기에 혹시라도 부모님이 들으시면 당장 라디오를 압수 당할지도 모르기에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아니면 이어폰을 한쪽 귀에 꽂아둔 채 책상에 앉아 야구중계 삼매경에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라디오를 통해서 매일마다 생생한 현장음을 들을 수 있게 된 그 해부터 나의 야구에 대한 사랑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치닫게 되었다. 비단 라디오 뿐만 아니라 공중파 채널에서도 매주 금요일이면 야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매주 금요일마다 KBS 1TV에선 야구 중계를 해주었는데, 지금이야 케이블TV에서 매일 전국 4개 구장의 경기를 모두 접할 수 있는 팔자 좋은 세상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금요일 저녁의 야구 중계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었다. 유수호 아나운서와 이세진 아나운서가 매주마다 번갈아가며 메인 MC를 담당하던 이 중계방송은 아쉬운 점이 딱 하나 있었다. 다름아닌 정규방송 관계로 승부의 끝을 번번히 놓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한된 시간, 정해진 편성으로 인한 중계의 한계. 그리고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에 밤 10시 45분의 스포츠 중계석을 기다려야 했는데, 이마저 놓칠 경우에는 마치 막차를 놓친 듯한 허탈감 속에 다음 날 아침의 조간신문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라디오는 그나마 10시,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9시 57분까지 중계를 해주었기에 좀 더 유연성(?)이 있었다. 하지만 별밤이 시작되는 10시 10분은 신성불가침(?)의 시간이었기에 아무리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더라도 눈물을 머금고(?) 중계를 마쳐야만 했다. 별밤이 시작되기 전에 방송되었던 당시 떠오르는 신성 스타들이었던 이규석과 김혜림이 진행하던 ‘하나 둘 셋 우리는 하이틴’은 종종 야구중계로 인해 방송을 거르는 경우도 많았다.

1989 시즌은 필자에게뿐만 아니라 프로야구 역사에서도 첫 번째 터닝포인트가 된 시즌 으로 기억될만 하다. 우선 제도의 변화가 생겼다. 이전 88시즌까지 전,후기리그로 나뉘어 진행되던 방식이 단일시즌제로 통합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89시즌을 앞둔 스토브리그에서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트레이드가 단행된다. 그 핵심인물은 롯데의 최동원과 삼성의 김시진, 그리고 롯데의 김용철과 삼성의 장효조였다. 롯데의 입장에선 1988년 빚어진 선수회 파동에 대한 괘씸죄의 성격으로 투,타의 간판선수들을 내친 것이고, 삼성의 입장에선 매년 포스트 시즌 에서 물을 먹는 팀의 고질병을 개혁하고자 과감하게 투,타의 기둥들을 바꾸는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공격에선 김용철과 장효조 모두 팀을 옮긴 이후에도 꾸준한 활약을 보여줬지만 각각 부산과 대구를 대표하던 명투수 동기생 최동원과 김시진은 급격한 내리막길을 보이며 쓸쓸히 은퇴하게 된다.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를 마치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치는 듯한 행태의 트레이드는 프로야구 역사에서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다. 89시즌을 앞두고 거물급 선수들의 트레이드 이후 성적에 많은 팬들의 관심이 쏠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88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되어 프로 입단이 1년 연기된 대어급 선수들과 더불어 89년 입단예정인 선수들 중에도 유난히도 걸출한 신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해태의 조계현,이강철,이광우,장호익 빙그레의 송진우,황대연,강석천 삼성의 강기웅,류명선, 최해명,강영수, 롯데의 김청수,서호진, MBC의 김기범,노찬엽,최훈재, OB의 구동우,김동현,이명수,임형석 등 이름만 들어도 금새 알 수 있는 ‘슈퍼대어급’ 스타들이 즐비해 있었다.

82년 프로야구 원년세대들이 노쇠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89년에 입단한 신인 선수들은 공,수에서 신선한 활약을 펼치며 세대교체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프로야구 2세대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투수에선 이강철(15승), 류명선(14승), 송진우(9승), 서호진(8승), 조계현(7승), 김기범(7승), 김청수(7승) 등이 입단과 동시에 팀내 주축투수 자리를 꿰찬다. 89년 입단 신인 중에 최다승은 15승을 거둔 타이거즈의 이강철이었지만, 최다이닝을 던진 투수는 의외의 인물인 자이언츠의 김청수였다. 38게임에 등판했는데 이중에 선발로 등판한 경기는 16경기 였으며,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이른바 ‘마구잡이’로 투입되며 무려 210.1이닝을 던진다.

당시 자이언츠의 투수진은 이른바 붕괴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허술하기 짝이 없었는데, 더욱 가관인 것은 팀의 에이스인 윤학길의 투구이닝이 무려 250이닝에 달한 것이다. 최동원과 트레이드 된 김시진의 부진, 초반에 6연승을 달리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용두사미에 그친 서호진 등이 받쳐주지 못하자 윤학길과 김청수가 합작하여 무려 460.1 이닝을 책임진 것이다. 결국 자이언츠는 꼴찌에 그쳤는데 당시 어우홍 감독의 투수기용의 원칙에 대해 되묻고 싶을 만큼 어이없는 처사라 할 수 있다.

타격에서는 강기웅의 활약이 독보적이었다. 아마야구 5연타석 홈런의 대기록의 보유자로서 이미 입단전부터 장효조의 대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 받았던 그는 김성래가 부상으로 빠진 2루 자리를 완벽하게 메운다. 홈런은 1개에 그쳤지만 정확성이 돋보이는 타격으로 0.322의 타율을 기록한다. 빙그레의 재일교포 강타자 고원부(0.327)에 밀려 아쉽게 타격 2위에 그치지만, 신인으로서 그의 활약은 주목 받을 만한 것이었다. MBC 청룡의 ‘검객’ 노찬엽도 0.287의 타율로 타격 11위, 타점 56개로 13위에 오르며 신인 돌풍에 한 몫을 거둔다.

1989시즌의 최고의 블루칩은? 다름아닌 김성근 감독의 태평양 돌핀스이다. 위에 언급한 신인들 중 태평양 소속은 단 한 명도 없었을 만큼 걸출한 신인도 없는 상황에서 일구어낸 돌핀스의 기적 같은 행진은 많은 야구팬들이 알다시피 마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중고신인들과 타 구단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노장선수들이 회춘하면서 일어난 시너지 효과였다. 무엇보다도 꼴찌에 익숙해져 있던 팀의 패배의식을 혹독한 훈련을 통해 걷어내고 악바리 근성을 이식한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이 단연 돌핀스 돌풍의 핵심 원동력이라 할 수 있었다.

박정현(19승 10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15)-최창호(10승 14패 2세이브, 평균자책점 2.22)-정명원(11승 4패 6세이브, 평균자책점 2.45) 중고신인 삼총사의 활약은 프로야구 역사에서 앞으로도 유례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천하의 선동열에 이어 나란히 평균자책점 2,3,4위를 차지한 삼총사의 힘은 바로 돌핀스 짠물야구의 핵심역량이었다. 잠수함-좌완-우완 이라는 완벽한 하모니와 개성 넘치는 투구폼 등은 마치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적이었다. 태평양 돌핀스는 페넌트 레이스를 3위로 마감하며(62승 54패 4무) 창단 최초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경사를 맞이하게 된다. 89시즌 인천구장을 찾은 관중은 419,498명이었는데 인천연고 구단 사상 최초로 40만 관중을 돌파한 것이며, 전년도 88시즌에 입장한 168,726명보다 무려 250% 가량 관중이 급증한 것이다.

창단 3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여 돌풍을 일으킨 빙그레 이글스도 71승 46패 3무의 성적으로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1위를 차지하며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게 된다. 반면 88시즌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충격의 3연패를 당하며 세대교체를 시도한 삼성 라이온즈는 83시즌 이후 최악의 성적인 57승 58패 5무의 성적으로 간신히 준플레이오프 티켓을 획득한다.

프로야구 사상 첫 준플레이오프가 펼쳐진 인천구장은 발디딜 틈도 없이 꽉 들어찼고, 태평양의 박정현과 삼성의 성준 간의 팽팽한 투수전이 전개되었다. 마치 손등이 그라운드에 닿을 듯한 역동적인 투구폼으로 라이온즈 타자들의 무릅팍 근처를 넘나들던 박정현의 위력적인 코너워크와 특유의 ‘느림의 미학’으로 돌핀스의 타자들과의 수읽기를 점령하는 성준의 투구는 ‘투수전의 진수’를 제대로 선사하였다.

결국 승부는 연장 14회에 터진 김동기의 결승 3점 홈런으로 마무리 되었고 박정현은 홀로 14이닝을 책임지며 팀에 첫 포스트시즌 승리를 선사한다. 2차전은 예전의 위력을 잃어버린 최동원과 돌핀스 트리오의 2차 주자 최창호의 맞대결. 4회부터 구원 등판한 신인 류명선의 호투와 김용국의 결정적인 만루홈런 한방으로 라이온즈의 4-2 승리.

운명의 3차전, 돌핀스는 다시 박정현이 선발로 등판하였고, 라이온즈는 승부근성 만큼은 전성기 그대로였던 최동원이 다시 선발로 등판한다. 그러나 최동원은 안타깝게도 예전의 위력을 다시 되찾지 못하고 이광길에게 선제 솔로홈런을 허용한다. 하지만 1실점만을 허용한 후 초반 경기흐름을 팽팽하게 유지시키는데 성공한다. 돌핀스는 박정현에 이어 8회부터 양상문이 이어 던지고, 라이온즈는 최동원에 이어 성준-김성길-류명선을 투입하는 총력전을 전개한다. 승부는 10회말 엉뚱한 곳에서 갈리게 된다. 선두타자로 등장한 김일권은 중전안타로 1루에 진출하게 되고 김일권의 빠른 발을 의식한 류명선은 그만 폭투를 던지면서 김일권은 3루에 안착하게 된다. 무사 3루의 절대 위기 상황에서 김진규-류동효를 고의사구로 거른 뒤 곽권희를 상대로 승부를 걸지만 곽권희의 타구는 외야 깊숙한 곳으로 쭉쭉 뻗어나가며 기나긴 승부는 마무리된다.

프로야구 사상 첫 준플레이오프는 매 경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이 펼쳐지며 화려한 서막을 열게 된다. 준플레이오프에 너무 전력한 탓일까. 돌핀스는 당대 최강팀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너무나도 맥없이 물러나고 만다. 에이스 박정현이 준플레이오프 2경기의 연투로 인한 부상을 입어 전력에서 이탈한 것이 큰 타격이었다. 그나마 접전이라면 조계현과 최창호의 투수전이 전개된 2차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기도 최창호 혼자 타이거즈를 상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돌핀스의 공격진은 조계현에게 철저히 농락당한다. 이날 경기를 앞두고 당시 경기 중계를 맡은 허구연 해설위원이 최창호에게 경기 등판 전 식사는 무엇으로 했냐고 물어보자 최창호는 밥과 국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긴장되어 있었지만, 마운드 위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혼신의 역투를 펼친다.

정규시즌 7승에 머물며 아마 최고 투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던 조계현은 큰 경기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위력을 보여주며 명예회복을 한다. 마지막 3차전에서 선동열은 돌핀스 타자를 상대로 무려 10타자 연속 탈삼진 이라는 무력시위를 펼치며 당대 최강의 포스를 맘껏 내뿜는다. 88년에 이어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게 된 빙그레 이글스와 해태 타이거즈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 선발은 빙그레의 ‘고무팔’ 이상군과 해태의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이었다. 1차전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이강돈의 선제 홈런과 적시에 터진 결정력을 앞세운 빙그레의 4-0완승이었다.

천하의 선동열을 무너뜨린 빙그레의 사기는 절정에 다다르며 창단 첫 우승에 대한 꿈이 무럭무럭 익어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 순간의 결정적 실수 하나로 인해 시리즈 전체의 향방은 순식간에 뒤집혀진다. 2차전에 나온 유격수 장종훈의 결정적인 알까기가 잠들 뻔했던 호랑이의 승부본능을 일깨우며 이후 경기는 일방적으로 타이거즈의 흐름으로 흘러간다. 상대방의 실수를 절대 놓치지 않고 반전의 기회로 삼는 타이거즈의 놀라운 포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선동열이 부진해도 타이거즈에는 신동수,문희수,김정수,이강철 이라는 A급 투수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86시즌부터 내리 4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타이거즈의 80년대는 화려함 그 자체였다.

프로야구 총 관중은 2,883,669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한다. 올림픽 이후 최고의 국민스포츠 자리를 선점한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걸출한 신인들이 대거 입단 하여 신선한 돌풍을 일으킨 것도 관중증가의 큰 요인이었다. 극장가에선 직배영화의 돌풍이 거세게 불어 닥쳤다. 88년 가을 ‘위험한 정사’로 국내에 상륙한 배급사 UIP는 89년에 접어들어 ‘레인맨’, ‘인디아나 존스3’, ‘트윈스’ 등의 히트작들을 대거 배급하며 관객몰이에 성공한다. 당시 메인 상영관이라 할 수 있는 대한극장,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국도극장,중앙극장,허리우드극장,스카라극장 등에는 극심하던 반대 여론 탓에 영화를 내걸지 못하였지만 당시로선 변방 상영관에 속하던 씨네하우스,신영극장,코리아극장 등에 배급하는 형식으로 접근한 UIP의 전략은 적중하였다.

직배영화로 인해 헐리웃 대작들을 공수하기가 점점 어려워진 상황에서 메인 개봉관들의 직배영화 상영은 점차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87년 <영웅본색>, 88년 <영웅본색2>로 이어진 홍콩영화의 돌풍은 89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특히 주윤발,왕조현,장국영 등의 홍콩 스타들이 국내 CF에 대거 등장한 것이다. ‘싸랑해요 밀키스’의 주윤발, ‘반했어요 크리미’의 왕조현, ‘사랑을 전할 땐 투유 초콜릿’의 장국영 등은 브라운관에서도 국내 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는다. 또한 장국영은 국내 최고 인기가수 이선희와 합동 콘서트를 열며 인기몰이에 나서는데 당시 그가 들고 나온 신곡 <무심수면>은 국내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다.

국내 대중가요에선 댄스곡의 열풍이 휘몰아친다. 그 선두주자는 일명 코걸이 춤, ‘ㄱ ㄴ’춤 으로 인기몰이를 한 박남정인데, ‘널 그리며’, ‘사랑의 불시착’ 등 2곡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인기 여세를 몰아 출연한 영화 ‘새앙쥐 상륙작전’은 그의 노래제목처럼 흥행에 불시착하고 만다. 인기 댄스그룹 소방차의 ‘사랑하고 싶어’, 김완선의 ‘기분좋은 밤’도 많은 인기를 모으며 댄스곡 열풍에 일조한다.

89년에는 가수들의 영화출연 이 유난히도 잦았는데 이상은의 ‘담다디’ (서울관객 27,593명) ‘굿모닝 대통령’(서울 관객 58,117명), 김흥국의 ‘앗싸 호랑나비’(131명) 등은 모두 흥행에 실패하며 본업 외의 외도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임을 느끼게 한다. 최근에도 비가 헐리웃에 처음 진출한 영화로 화제를 모았던 ‘스피드 레이서’가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한 바 있다. 브라운관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프로로는 KBS 2TV의 ‘쟈니윤 쇼’를 들 수 있다. 미국에서 오랜 기간 활동한 쟈니윤은 어눌하면서도 세련된 진행으로 국내에 처음으로 토크쇼 장르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데 보조 진행자로 등장하지만 결코 보조의 역할에 머물지 않은 조영남의 맛깔스런 진행도 프로그램의 성공에 큰 공헌을 한다. 이후 ‘밤과 음악사이’, ‘이문세 쇼’, ‘서세원 쇼’, ‘김혜수의 플러스 유’, ‘이홍렬 쇼’, ‘주병진 나이트 쇼’ 등 토크쇼 프로그램들이 90년대 후반까지 대거 등장하게 된다.

올림픽 이후 본격적으로 개방의 물결이 불어닥치기 시작한 국내 대중문화는 90년대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프로야구도 마찬가지이다. 89년 프로야구 2세대 선수들이 대거 등장하며 신선한 돌풍을 일으키는데 91년 한,일 슈퍼게임이 처음으로 열리게 되면서 그 동안 직접 접해보지 못한 일본야구의 높은 수준을 몸소 접하게 되면서 국내 야구의 패러다임에 전환점이 발생하게 된다. 89년은 프로야구, 대중문화에 있어 90년대에 일어날 급속한 변화의 예고편이었던 한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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