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에서 헐리웃 영화 패러디를 본 듯한 기분. 영화 '스파이'

2013. 9. 20. 10:19Entertainment BB/movie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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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에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가볍고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찾게 된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추석만 되면 성룡이 몸을 던져 헌신하는 아크로바틱 액션 영화들이 속속 선을 보이다보니 추석만 되면 그런 영화들을 본다는 것이 은연 중에 몸에 배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그리고 추석이란 명절의 시기를 살펴보면 모처럼 온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해의 전환점을 넘어서는 시점에 맞이하는 연휴이다. 전환점을 돌면서 지친 심신의 피로를 풀고(과연 얼마나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스트레스 훌훌 털고 충전해서 한 해의 마무리를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할 시기이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머리 아픈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일 수도 있다. 영화 '스파이'는 그런 의미에서 추석과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영화이다. 아내 몰래 국가의 중대한 운명이 걸린 작전에 투입되는 최고급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철수(설경구)와 장손의 아내로서 늘 처가집의 갈굼에 시달리고 정작 남편은 늘 출장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허다해서 불만이 잔뜩 쌓여만 가는 스튜어디스 아내 영희(문소리)의 티격태격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전개가 진행되는 영화 '스파이'는 설정 부터가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느낌을 전한다.

 

 

 

 

바로 1994년 여름에 개봉하여 극장가를 석권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 아놀드 슈왈츠네거 주연의 첩보 액션 블록버스터 '트루 라이즈'이다. 평범한 샐러리맨을 가장한 채 비밀요원 업무를 수행하는 테리(아놀드 슈왈츠네거)는 우연히 아내 헬렌(제이미 리 커티스)이 첩보원을 가장한 채 사기극을 펼치는 자동차 딜러 사이먼(빌 팩스턴)과 바람을 피우려는 것을 알게 되고 중대한 첩보작전이 걸려 있는 와중에도 최첨단 기기를 동원하여 아내 헬렌과 사이먼이 밀회를 즐기려는 현장을 급습한다.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고 아내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심문하는 테리의 모습은 관객들의 폭소를 자아냈고, 이후 남편의 첩보작전에 의도치 않게 개입하게 되는 헬렌의 예상치 못한 좌충우돌 대활약은 더 큰 웃음을 선사한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부분에서는 수직 이착륙기인 해리어 전투기를 동원하여 테러리스트들의 아지트를 폭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최첨단 특수효과를 동원하여 마치 실제 전투 장면을 방불케 하는 현실감 넘치는 액션장면을 제공하여 관객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폭소와 스펙터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압도한 뒤 마무리에서는 감미로운 탱고 음악에 맞춘 테리와 헬렌의 격렬하면서도 코믹한 탱고 댄스 장면을 제공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흥겨운 기분으로 극장문을 나서게 한다.

 

프랑스 영화를 원작으로 삼았으나 원작보다 더 큰 재치와 유머를 선사하고 헐리우드 특유의 압도적인 스케일을 동원하여 탄생시킨 '트루 라이즈'는 언젠가 다시 리메이크로 보고 싶은 기대감을 선사한 작품이었다.

 

그런데 헐리웃보다 한국에서 비슷한 유형의 영화가 먼저 선을 보이게 되었고, 과연 한국판 '트루 라이즈'라 할 수 있는 영화 '스파이'는 어떤 형태로 선을 보일까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미스터 K'였다. '미스터 고'가 아닌 '미스터 K'였는데, '스파이' 크레딧에 보면 감독에 '퀵'의 조감독 출신인 이승준 감독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스파이'의 원 제목인 '미스터 K'의 연출은 이명세 감독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이명세 감독은 태국에서 촬영 도중 제작진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다 결국 중도에 연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이 영화의 제작은 윤제균 감독이 운영하는 JK필름에서 맡았다. 알다시피 이명세 감독은 스타일 넘치는 화면을 중요시하는 형이상학적 심미안에 가치를 두는 반면, 윤제균 감독은 철저한 실용주의파라 할 수 있다. 애초부터 두 사람의 만남은 마치 야구에 비유하자면 SK 김성근 감독과 이만수 수석코치의 만남처럼 궁합도 기대하기 힘들 뿐더러 파국이 예상되는 만남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명세 감독이 연출에서 손을 떼면서 영화 '스파이'는 코믹에 훨씬 초점이 맞추어져 제작되었다. 일단 영화를 보면 진지한듯 싶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관객들을 웃겨야 한다는 제작진의 강박관념(?)이 느껴진다. 등장하는 배우들은 제작진의 주문 사항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주연을 맡은 설경구와 문소리는 마치 진짜 부부같이 느껴질 정도로 찰떡 궁합을 과시하며, 모처럼 한국 영화에 모습을 나타낸 다니엘 헤니의 매력도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조연을 맡은 고창석, 정인기, 라미란 등의 배우들은 최근 극장가에 떠오르는 '씬 스틸러' 답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영화의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배우들은 충실히 자신의 몫을 수행하지만 영화가 기본적으로 스토리가 빈약하고 허술함이 곳곳에서 드러나며 동시에 액션 장면도 별다른 감흥을 선사하지 못한다. 그리고 극 종반부에서 문소리가 기관총을 람보처럼 난사하는데 예기치도 않게 테러리스트들이 총을 맞고 나가 떨어지는 장면은 '트루 라이즈'에서 제이미 리 커티스가 자동 기관총을 계단에 떨어 뜨리자 그 기관총이 제멋대로 난사되면서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하는 장면과 너무도 유사하다.

 

예기치도 못하게 프로젝트가 중도에 좌초될 위기에 처하면서 제작진은 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살려내려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안간힘을 써서 소생시킨 영화치곤 고민한 흔적이 너무 부족해 보이고 오히려 무성의한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출연한 배우들은 무슨 죄가 있으랴.

 

윤제균 감독의 JK 필름이 근래 선보인 작품들 중 '퀵', '7광구' 그리고 이번에 선보인 '스파이' 등을 보고 있으면 1990년대 초반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이후 비슷한 패턴과 공식들을 남발하면서 스스로 자멸해간 홍콩영화들을 보는 듯한 느낌이 떠오른다.

 

만약 이 영화를 원래 계획대로 이명세 감독이 연출했으면 어떤 분위기의 영화가 탄생했을지 자뭇 궁금해진다. 다만 개봉시기를 추석이 아닌 다른 시기로 잡았어야 했을 것이다. 추석에는 이명세 스타일이 통하지 않음을 2005년 '형사-듀얼리스트'를 통해 뼈저리게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추석에는 가능하면 가볍게 웃고 즐길 수 있는 영화가 통한다는 속설을 최대한 활용한 영화 '스파이'에 전반적인 총평을 내린다면 그나마 몇 년 전에 선보인 '가문의 영광' 시리즈 (2002년 1편은 정말 괜찮은 오락영화였다.) 처럼 형편없는 부실공사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볍지만 알찬 오락물을 위해 고민한 흔적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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