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를 꿋꿋이 지키고 후배들을 이끄는 '74년생 3인방'

2013. 8. 20. 09:50Sports BB/야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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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야구에서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박재홍, 차명주, 송지만, 홍원기, 정민철, 염종석 등의 73년생 92학번 선수들을 역사상 가장 화려한 '황금세대'라 호칭한다. 하지만 바로 아래 학번인 74년생 93학번 선수들도 바로 1년 위 선배들 못지 않게 화려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1993년 부터 시작된 국내 프로야구 흥행열풍은 1995년 사상 최초 총관중 500만명을 돌파하면서 절정에 다다른다. 이듬해 1996년 총관중수가 다시 400만명대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프로야구의 열기는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기였다.

 

1997시즌을 앞두고 각 구단에는 74년생 93학번 대어급 신인들이 대거 입단하였다. 대표적인 선수들이 LG 이병규, OB 진갑용, 롯데 손민한, 한화 이성갑, 현대 최만호, 최영필 등이었다. 한화 이글스에 입단한 우완 정통파 투수 이성갑의 경우 미국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그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는 기사가 나올만큼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프로 무대에 데뷔해서는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쓸쓸히 그라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어느 덧 74년생 93학번 선수들은 국내 나이로 40세에 접어들었다. 일반적으로 35세에서 37세 사이에 은퇴를 많이 하는 성향을 감안하면 40세는 프로야구 선수로 치면 사실상 '환갑'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나이가 무색하게 15년이 넘도록 그라운드를 지키고 덕아웃의 리더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활약은 어지간한 20대~30대 초반의 선수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이다. 당장 그들이 빠진다면 팀 전력과 케미스트리의 공백이 걱정될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다.

 

바로 LG 트윈스 외야수 이병규, 삼성 라이온즈 포수 진갑용, NC 다이노스 투수 손민한이다.

 

1. 11년만의 가을 무대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적토마 이병규

 

장충고, 단국대를 졸업하고 계약금 4억 3천만원에 LG 트윈스 유니폼을 입은 이병규는 입단 첫 해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면서 타율 0.305, 7홈런 69타점 23도루의 눈부신 활약을 펼친다. 당시 트윈스는 1995년 심재학, 1996년 이정길 등 기대를 걸고 영입했던 신인 선수들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간절히 원했던 임선동마저 일본 진출을 선언하는 바람에 원활한 세대교체에 차질을 빚고 있었다. 하지만 이병규는 2년 가량 지속되던 트윈스의 신인 가뭄에 완벽한 해갈역할을 하였다.

 

호쾌한 타격에 빠른 기동력까지 겸비한 이병규는 매끈하고 훤칠한 몸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춘 그의 외모에 견주어 '적토마'라는 애칭을 얻게 되었다. 정교함과 장타력을 동시에 선보일 수 있는 그의 타격 재능은 일본의 야구천재 이치로에 비견되기도 했다. 입단 첫 해(1997년)와 이듬해(1998년) 팀이 연속으로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이병규는 아쉽게도 당대 최강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현대 유니콘스의 벽에 막혀 우승의 감격을 누리지는 못했다.

 

1999년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30-30 (홈런-도루) 클럽에 가입하면서 절정의 기량을 뽐냈고, 이후 2003 시즌을 제외하곤 매 시즌 100경기 이상 출장하면서 팀의 중심타선을 꿋꿋이 지켜왔다. 2006시즌 이후 2007년부터 3시즌 동안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동한 이병규는 2010시즌 다시 국내로 복귀하여 매 시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꾸준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올 시즌에는 주장을 맡은 이병규는 5월에 팀에 합류한 이후 불꽃타격을 과시하며 팀의 상승세를 앞장서서 이끌고 있다. 최근에는 허벅지가 안좋은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출장을 감행하며 동료들의 파이팅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전에 비해 이병규가 달라진 점은 그라운드 뿐만 아니라 덕아웃에서도 한층 적극적인 모습으로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한 '캡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병규가 올 시즌 팀의 가을 무대 진출을 넘어 어디까지 팀을 이끌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2. 자이언츠의 암흑기를 버텨주고, 인생의 암흑기를 넘어서 부활한 손민한

 

2000년대 초반은 롯데 자이언츠 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라 할 수 있다. 중국집 전화번호를 연상하게 하는 팀 순위 변동은 자이언츠의 앞날에 아무런 희망이 느껴지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2004년 부터 서서히 자이언츠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고 2007년까지 매 시즌 봄날에는 가을 잔치에 대한 희망을 느끼게 해주면서 '봄데'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봄에라도 잠시나마 팬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던 것은 자이언츠 마운드에 손민한이라는 고독한 에이스가 꿋꿋이 버텨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7년 입단 당시 부상으로 인해 2년 가까이 재활을 거친 손민한은 2000년대 부터 서서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고 2005시즌 18승 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46의 눈부신 활약으로 자이언츠를 넘어 전국구 에이스로 발돋움하게 된다.

 

이후 매년 꾸준히 10승 이상씩을 거두면서 암흑기 자이언츠를 지탱한 손민한은 2008시즌 새로 부임한 로이스터 감독의 리더십에 힘입어 팀이 새롭게 '환골탈태'하면서 비로소 암흑의 터널을 벗어나게 된다. 송승준, 장원준과 더불어 막강 선발 트리오를 형성한 손민한은 팀의 에이스이자 맏형으로서 자이언츠 마운드를 이끈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든 팀의 햇살을 손민한이 누릴 시간은 너무도 한정되어 있었다. 2009시즌을 앞두고 어깨에 이상을 느낀 손민한은 재활을 거쳐 후반기 팀 마운드에 합류했지만 좀처럼 구위가 회복되지 못하다가 다시 부상을 안게 되었고 결국 2009시즌 포스트 시즌 엔트리에서 제외된다.

 

또 다시 시작된 재활의 시간은 입단 초기 겪었던 재활보다 더욱 험난한 시간이었다. 동시에 선수협회 회장직을 겸하고 있었던 손민한은 선수협회 비리에 의한 송사에 휘말리면서 인생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손민한이 더 이상 선수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올 시즌을 앞두고 은퇴를 하면서 동시에 선수협회장 직도 내려놓게 된 박재홍이 주도하여 손민한이 현역 복귀할 수 있는 길을 터주었고, 손민한은 제2의 고향팀이라 할 수 있는 NC 다이노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6월부터 다이노스 투수진에 합류한 손민한은 이전에 보여준 특유의 노련한 경기운영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다이노스 마운드에 큰 힘을 보태고 있다. 후반기부터는 마무리 또는 필승계투 요원으로 나서고 있는데 그가 합류한 다이노스 계투진은 이전에 비해 훨씬 끈끈해졌고, 이로 인해 다이노스의 뒷심도 훨씬 견고해졌다.

 

손민한은 마운드 뿐만 아니라 덕아웃에서도 어린 선수들이 많은 다이노스 투수진에게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에 의한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다. 잠재력이 풍부한 다이노스 투수진은 더욱 무섭게 진화할 전망이다.

 

3. 라이온즈의 '게임 체인져' 진갑용

 

삼성 라이온즈는 프로 원년부터 공격력이 돋보이는 팀이었다.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강기웅, 양준혁, 이종두 등 화려한 멤버들로 구성된 타선은 그야말로 올스타급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매년 우승의 문턱에서 겉돌아야 했는데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빈약한 포수진이었다.

 

이만수라는 걸출한 공격형 포수가 있었지만 투수 리드 능력은 상대방의 허를 찌를 수 있을만큼의 영민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90년대 들어 이만수가 노쇠화를 보인 이후부터는 라이온즈의 포수 인력난은 더욱 심화되었다. 김성현, 박선일, 김영진, 임채영, 장성국 등 다양한 인원을 앉혔지만 당대 최고 포수인 김동수, 박경완 등에는 경쟁력이 현저히 못미쳤다.

 

부산고 시절 손민한과 배터리를 이뤄 모교를 전국 최강으로 이끌었던 포수 진갑용은 고려대에서도 손민한과 함께 찰떡궁합을 이루며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하지만 1차 지명에서 1명 밖에 지명하지 못하는 제도 규정상 두 사람은 프로에서 갈라지게 될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연고 구단 롯데 자이언츠는 1997시즌 1차 지명에서 투수 손민한을 지명했고, 진갑용은 2차 1순위로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러나 OB 베어스는 전통적으로 포수 왕국이었고, 1990년대 중후반에는 김태형, 이도형, 최기문 등 다른 팀에 가면 주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수준급 포수들로 넘쳐났다. 진갑용이 설 자리는 지극히 좁았다. 설상가상으로 1999년 홍성흔이라는 걸출한 후배가 가세하면서 진갑용의 입지는 사실상 제로에 가까웠다. 결국 진갑용은 1999년 트레이드 마감 시한 직전 삼성 라이온즈의 투수 이상훈(현금 4억원 포함)과 맞트레이드 되면서 야구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당시 포수 인력난이 극심했던 라이온즈와 진갑용은 그야말로 최상의 궁합이었다. 또한 진갑용은 라이온즈에서 조범현 코치를 만나게 되면서 포수로서의 경쟁력을 한차원 더 업그레이드 시키게 된다. 진갑용이 가세하면서 라이온즈의 안방 수맥은 그 동안 막혔던 기혈이 시원하게 뚫리면서 안정을 구축하게 된다.

 

진갑용은 라이온즈의 부동의 안방마님으로 활약하면서 팀의 2000년대 전성기를 이끌게 된다. 2000년대 들어 라이온즈는 5차례 리그를 제패하는데 진갑용의 역할은 기록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소속팀 뿐만 아니라 국가대표로서도 진갑용은 맹활약을 펼치는데 2008 베이징 올림픽 당시에는 주전포수로 활약하다가 허벅지 부상을 입고 준결승, 결승에서는 스타팅으로 나서지 못했는데 쿠바와의 결승전에서 9회말 1사 만루의 위기상황에 퇴장당한 강민호 대신 투입하여 정대현을 안정적으로 리드하여 극적인 병살타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라이온즈는 이지영이라는 차세대 포수를 육성 중이다. 하지만 진갑용의 존재는 지금도 라이온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향후 2~3년 동안은 이지영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진갑용의 멘토링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이병규, 손민한, 진갑용 등 세 명의 74년생 동갑내기 선수들은 나이가 무색한 활약으로 소속 팀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세 선수의 가장 중요한 공통적인 특징은 뛰어난 완급조절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력을 기울여야 할 때와 힘을 아껴야 할 때를 적절하게 캐치하여 경기를 조율하는 능력은 후배 선수들도 귀감으로 삼아야 할 부분이다. 앞으로 세 명의 노장 선수들의 활약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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