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축소판을 질주하는 열차에 담아낸 영화 '설국열차'

2013. 8. 11. 12:12Entertainment BB/movie talk

728x90
반응형

2003년 '살인의 추억'에서 1980년대 어두웠던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2006년 '괴물'에서는 개발 성장 시대의 노폐물이 응축된 괴물을 통해 우리 사회의 기형적인 단면을 묘사하고 또한 힘있는 자들의 농간 속에서 자신의 딸을 구하려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사투를 보여주고, 2009년 '마더'에서는 험난한 세상에 맞서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아들을 지켜내려는 어머니의 눈물 겨운 그리고 절대 손가락질 할 수 없는 모성애를 그려낸 봉준호 감독.

 

2000년 데뷔작 '플란더스의 개' 이후 3년 주기로 작품을 선보인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는 1년을 더하여 4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다. 그런데 스케일이 이전 작품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졌다. 프랑스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설국열차'인데 크리스 에반스(우리에게 '캡틴 아메리카'로 잘 알려진 배우), 틸다 스윈튼, 존 허트, 에드 해리스 등 국내에도 잘 알려진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웠고, 송강호와 고아성 등의 국내 배우도 함께 출연한 그야말로 '올스타 캐스팅'을 과시한다.

 

얼핏 보아선 헐리우드가 주도한 캐스팅에 국내 배우들이 함께 합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설국열차'는 기획 단계부터 제작까지 모든 과정이 국내 영화사와 자본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된 글로벌 프로젝트이다. 그리고 개봉 전에 이미 167개국과 사전 계약을 맺으면서 제작비 430억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220억원을 벌어들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쏘아올린 미사일로 인해 지구는 빙하기를 맞이하게 되고 모든 생명체들은 멸종하였다는 설정에서 출발한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상의 남은 생존자들을 태우고 지구 전체를 1년 주기로 왕복하며 열차 안에서 생태계를 구성한다. 이른바 가진자들로 대변되는 상위계층은 앞칸에서 지구에서 누렸던 것과 다를 바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만 꼬리칸에 탑승한 이들은 매일 지옥과도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삶을 영위한다.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반란을 주도하는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일행이 앞칸으로 한 걸음씩 전진할 때마다 갈등과 위기감이 증폭되고 설국열차 안에 숨겨졌던 비밀들이 한꺼풀씩 드러나게 된다. 가진 자들의 핵심인 열차를 소유하고 엔진을 설계한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그의 핵심 수하인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는 총과 균(영화의 핵심 소재라 할 수 있는 양갱같이 생긴 단백질 블럭안에 숨어 있다.) 그리고 쇠(각종 다양한 무기와 두텁게 설계된 문)를 앞세워 꼬리칸에 몰려 있는 인종들을 지배하고 통제한다.

 

하지만 커티스는 그가 멘토처럼 모시는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 길리엄(존 허트)과 함께 반란을 암중모색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수단 중에 하나는 껍데기에 불과함을 간파하고 반란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윌포드 일당은 열차의 설계도와 동선에 맞춰 치밀하게 꼬리칸 인종들을 주도 면밀하게 제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위기 순간에서 커티스 반란군 일행을 구한 것은 '불'이었다. 마치 인류가 태초에 포유류 중에서 가장 우월한 존재로 거듭나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작용했던 '불'의 상징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영화 액션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는 도끼, 망치, 창들로 반란군과 진압군이 펼치는 혈투 장면은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최민식)가 밀폐된 공간에서 펼치는 망치 액션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바로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제작을 맡았기 때문에 이런 장면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커티스 반란군 일행은 윌포드 일행의 핵심 수하였던 메이슨을 생포하고 서서히 앞칸에 다가가기 시작하지만 앞칸에 다다르는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열차의 보안 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와 그의 딸(고아성)은 남다른 예지력과 관찰력으로 극 전개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외국시장을 겨냥하여 지명도 높은 헐리웃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사건 해결의 키는 국내 배우들에게 쥐게 한 것은 그동안 외국과 합작한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시도라 할 수 있다.

 

열차의 모든 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확연히 드러나는 빈부격차,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열차 안의 모든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심지어는 꼬리 칸에 남아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살육할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기도 한다. 세계사나 우리 역사로 볼 때 주요 전쟁들을 통해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국가들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진 자의 특권을 확실하게 누리고 있다. 세계 열강들의 이해 관계 속에 반으로 나뉘게 된 우리 역사의 서글픈 현실도 어찌보면 당시에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꼬리칸에 속한 신세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가진 자의 핵심인 윌포드는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야 하는 질서가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강조한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당근을 통해 커티스의 혁명을 무너뜨리려 한다. 하지만 커티스는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른 해방구를 찾으려는 남궁민수의 시도는 열차의 운명을 시계제로로 만들게 된다.

 

영화 '설국열차'는 보는 내내 긴박감을 놓치지 않고 일관되게 흥미를 유지한다. 그리고 영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극장문을 나서는 동안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곱씹게 만들어준다. 그것이 바로 봉준호 영화의 핵심이자 매력이라 할 수 있다.

 

영화의 엔딩을 두고 허무하다는 의견도 꽤 많이 나오지만 어찌보면 새로운 생태계가 시작되고 그 속에서 결국 새로운 계급과 갈등이 형성되고 구축됨을 암시하는 결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시 한 번 봉준호 감독은 열차처럼 미친 듯이 질주하는 이 세상에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