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만족스러운 컨텐츠, but 한심한 인프라만 부각시킨 잠실대첩

2013. 5. 1. 10:45Sports BB/야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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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4월 30일 금요일, 프로야구 출범이후 사상 처음으로 잠실야구장 평일 경기가 매진되는 기록을 수립하게 된다. 1993시즌은 양준혁, 이종범, 이상훈, 구대성, 김홍집, 김경원, 노장진 등 초대형 신인들이 대거 선을 보이면서 시즌 초반 관중몰이에 성공한다. 특히 서울을 연고지로 삼는 LG 트윈스가 전년도의 부진을 씻고 시즌 초반부터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면서 흥행 가속도는 더욱 불이 붙게 된다.

 

당시 3위를 달리던 홈팀 LG 트윈스는 1위팀 해태 타이거즈와 선두 자리를 놓고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되었다. 당시 고3이었던 필자도 야간 현장 자율학습(?)이라는 명목하에 친구들과 잠실 야구장을 찾았다. 당시 31,000석을 수용할 수 있었던(현재는 27,000명) 잠실구장은 빈자리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들어찼다. 장내 아나운서가 방송을 통해 만원사례를 알리면서 평일 경기로서는 사상 첫 매진을 기록했다는 기념비적인(?) 멘트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트윈스 김기범과 타이거즈 김정수의 좌완 선발 맞대결로 펼쳐진 경기에서 타이거즈는 당시 신인이었던 이종범의 프로 데뷔 첫 홈런과 홍현우의 3점 홈런 등을 묶어 트윈스에 5-1로 승리를 거두게 된다. 학생의 신분상(더군다나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맞춰야 하는 관계로) 늦게까지 경기장에 남아 있을 수 없었던 필자는 8회까지 보고나서 야구장을 나왔다. 그런데 9회말 마지막 공격에 당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이 등판했는데, 필자는 선동열이 던지는 장면을 직접 볼 수 없었던 것이 두고두고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갑자기 20년 전 야구장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2013년 4월 30일 잠실 야구장도 올 시즌 처음으로 평일 매진을 기록했고, 원정팀이 KIA 타이거즈이고 현재 선두를 달리고 있는 점도 20년전과 흡사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마무리 투수로 나서 경기를 매조지했던 선동열은 이제 고향팀의 감독이 되어 벤치에서 진두지휘하는 상황이 되었다. 상대팀은 LG 트윈스가 아닌 두산 베어스로 바뀌었지만 두산 베어스는 4월 30일 이전까지 타이거즈와 공동 1위를 달리면서 올 시즌 최고의 빅매치의 여건이 형성되었다.

 

우완 파이어볼러인 베어스의 노경은과 타이거즈 소사의 맞대결로 펼쳐진 4월 30일 경기에서 타이거즈는 경기 초반 상대 선발 노경은을 집중 공략하면서 기선 제압에 성공한다. 3회까지 타이거즈가 5점을 뽑으면서 앞서나갈 때만해도 타이거즈가 대량득점을 뽑으면서 경기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베어스의 뚝심은 남달랐다. 3회말 2점, 4회말 1점을 뽑으면서 5-3으로 바짝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선의 지원이 뒷받침되면서 1회부터 3회까지 줄곧 점수를 내준 노경은도 4회와 5회 무실점으로 버티면서 경기를 박빙모드로 몰고 갔다.

 

스코어는 5-3이었지만 타이거즈는 수차례의 호수비로 대량실점의 위기를 넘겼다. 2회말 수비에서 나온 유격수 김선빈의 그림같은 다이빙 캐치, 그리고 3회말 2사 만루의 위기에서 이원석의 우중간을 가르는 타구를 점프 캐치해서 잡아낸 우익수 김상현의 호수비가 없었다면 타이거즈는 경기의 흐름을 상대에게 내줄 뻔 하였다. 특히 우익수 김상현은 외야로 전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상대 주자를 속이는 페이크 수비를 선보이는 등 재치있는 수비감각을 뽐내면서 수비 불안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털어냈다.

 

경기초반 5-3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경기는 클리닝 타임 도중 시원한 찬물 세례(?)를 받게 된다. 느닷없이 잠실구장이 정전이 되면서 경기장은 순식간에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장 분위기로 돌변하게 된다. 만약 박빙의 경기가 펼쳐지던 상황에서 정전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특히 플라이볼을 잡는데 애를 먹는 타이거즈 유격수 김선빈이 높이 뜬 플라이볼을 잡으려다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면...아마도 김선빈은 또 다시 타구에 얼굴을 강타당하는 부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가장 좋은 시설의 야구장에 속하는 편인 잠실 야구장의 정전사태는 국내 야구장의 인프라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잠실야구장도 개장한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1982년 세계 야구선수권 대회를 앞두고 개장할 당시의 모습에서 큰 변화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좌석도 바뀌고 야구장 곳곳에 이전보다 다양한 먹거리가 들어서고 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인프라는 1980년대 수준에서 전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지자체가 야구장 시설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시민의 공익을 위하는 것이라면 임대료 인상에 골몰하지 말고 과감하게 구단에 위탁 운영권을 맡겨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모델로 바뀌어야 한다. 잠실야구장 안의 형광등 전기가 나가도 구단에서 마음대로 수리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잠실 야구장의 현 주소이다. 비단 잠실 야구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잠실야구장 그라운드는 정비 상태가 부실하여 매 경기때마다 불규칙 바운드가 출첵(출석체크)하듯이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불규칙 바운드로 인해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야수들의 수비력이 이전에 비해 저하된 것도 문제이지만 좋은 수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인프라마저 갖춰지지 않은 것도 더 큰 문제였다.

 

공동 1위를 달리는 팀들 답게 박진감 넘치는 플레이와 호수비로 모처럼 야구팬들의 안구정화를 시켜준 명승부였지만 한심한 인프라는 천만관객 시대를 꿈꾸는 프로야구에 진정한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 준 4월 30일 잠실대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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