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소재 블록버스터 영화에 진보를 가져오다. 영화 '베를린'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대한민국. 그리고 한 때 대한민국 처럼 반으로 갈려 있었던 독일, 그 독일의 중심도시였던 베를린에서 분단의 상처를 지니고 사는 남과 북의 인물들이 생존을 위한 혈투를 펼치게 된다. 하지만 생존의 이유에는 더 이상 이념이 자리하지 않는다. 자신의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맞붙을 뿐이다.

 

영화 '베를린'은 남과 북이라는 서로 다른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용도폐기 직전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북한군 최고의 정예요원이자 철저하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다니는 '고스트'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를 중심으로 북한 정권 교체 과정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고 급기야는 더 큰 야욕을 위해 음모를 서슴치 않는 또 다른 북한요원 동명수(류승범), 그리고 표종성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그의 뒤를 집요하게 쫓는 남한의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 스파이로 내몰리게 된 북한대사관 통역원이자 표종성의 아내인 연정희(전지현)의 얽히고 설킨 음모와 추격전이 펼쳐진다.

 

 

2010년 '부당거래'로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 류승완 감독, 2012년 '범죄와의 전쟁', '러브픽션' 등을 통해 차세대 흥행킹으로 주목 받는 하정우,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다시 인정받고, 영화에서도 권토중래를 노리는 한석규, 캬멜레온처럼 모든 캐릭터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류승범, 2012년 최고 흥행영화 기록을 갈아치운 '도둑들'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전지현이 한 영화에서 뭉치게 된 것만으로 설레임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영화 '베를린'은 초호화 캐스팅 외에도 정두홍 무술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등 최고의 스태프들이 참여하여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기대감을 드높였다.

 

극중 표종성(하정우)의 동선을 따라 진행되는 오프닝 크레딧은 역대 한국영화 오프닝 크레딧 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에 꼽힐 만큼 긴장감과 박력을 전달한다. 영화 초반부의 박력있는 액션장면은 영화에 충분히 몰입할 수 있는 스릴을 느끼게 한다. 다소 복잡할 수도 있지만 긴박감 넘치게 흘러가는 스토리 전개는 출연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력에 힘입어 스릴의 아드레날린 지수를 높여준다.

 

영화 곳곳의 액션장면과 종반부 하이라이트의 액션장면은 정두홍 무술감독의 모든 노하우가 집약된 결정체이고, 영화 '스카이폴'의 종반부 하이라이트를 능가하는 아날로그 액션의 진수를 보여준다. 최고의 크레딧이 모여 최상의 결과물을 이끌어낸 '베를린'에 대한 감상을 각 주연배우들 별로 나누어서 정리해본다.

 

하정우 : '범죄와의 전쟁'에서 간지나는 조폭 보스로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벌함으로 카리스마를, '러브픽션'에서는 고지식하면서 어벙한 듯한 작가 캐릭터로 큰 웃음을 안겨주었던 하정우는 이번 영화에서 그가 왜 차세대 박스오피스 킹인지를 확실하게 입증시킨다. 다부진 몸매에 표독한 표정, 몸을 사리지 않는 질펀한 액션으로 시각 쾌감의 극대화를 전달한 하정우는 자신의 아내에 연정희(전지현)에 대해 늘 무뚝뚝하지만 깊은 애정을 드러내지 않는 애절함으로 감동까지 선사한다. 헐리웃 블록버스터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보다 훨씬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낸 하정우는 한국 첩보 액션영화 캐릭터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한다.

 

한석규 : 2003년 '이중간첩'에서 베를린 경계선을 넘어선 이후 깊은 침묵에 빠졌었던 1990년대 충무로 박스오피스 킹 한석규는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통해 침묵의 껍질을 깨더니 이번 영화 '베를린'을 통해 10년 전의 트라우마에서 말끔하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류승완 감독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거칠고 질펀한 승부사 캐릭터를 완벽하게 재현한 한석규는 역시 변함없는 연기력과 관록을 과시한다. 한석규는 2009년 '백야행'에서부터 서서히 자신의 캐릭터에 변화를 주는 모습인데, 자신이 스토리 전개의 주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화자의 입장에서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을 더 돋보이게 해주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영화 개봉전에 기대했던 한석규의 권토중래는 확실하게 이루어졌다.

 

류승범 : 형 류승완 감독의 연출작마다 늘 다양한 캐릭터를 선보인 류승범은 욕망의 사로잡힌 동명수 역할을 표독스럽게 소화해내면서 표종성(하정우)과의 팽팽한 대립각을 보여준다. 야비하면서 잔혹함을 서슴치 않는 동명수 캐릭터는 류승범이 아니면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그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찬사를 아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전지현 : 영화 '도둑들'에서 발랄함과 섹시함 그리고 귀여움까지 겸비한 예니콜로 본인 연기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전지현은 '베를린'에서는 억척스러우면서 내적으로 강인한 연정희 캐릭터로 새로운 연기력을 선보인다. '도둑들'의 예니콜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전지현은 '연정희'라는 인물에 완전히 동화된 모습이다. 2001년 '엽기적인 그녀'의 대성공 이후 2003년 '4인용 식탁'에서 너무도 극적인 변신을 시도하다가 추락의 쓴맛을 보았던 전지현은 이후 그저 CF에서나 선보이는 여배우의 이미지로 고착될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캐릭터 소화능력은 뛰어나다는 것을 그리고 대중들의 기호와 부합되는 작품을 만나면 그녀는 언제든지 빛을 발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1999년 영화 '쉬리'에서 비롯된 남북 소재 블록버스터는 표현기법에서 많은 변화와 진보를 가져왔다. 이념의 극한대립 속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 밖에 없었던 남과 북의 연인('쉬리'), 친구 또는 형제보다 더 뜨겁고 진한 우정을 나눴지만 결국 분단 체제하에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눌 수 밖에 없었던 남과 북의 병사들('공동경비구역 JSA'), 남으로 귀순하지만 여전히 이념에 충실하려다가 결국 북으로부터도 버림받게 되는 첩보원('이중간첩'), 남과 북이 서로 총구를 겨누지 않는 마을에서 서로의 공동체를 이루어 우정을 나누다가 결국 전쟁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함께 매몰당하는 남과 북의 병사들('웰컴 투 동막골') 서로를 경계하고 대립하다가 서로의 체제 속에서 폐기된 개인들이 다시 부활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지만, 점점 우정을 쌓아가면서 이념의 벽을 넘어서는, 형제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는 남과 북의 사내의 이야기('의형제')등 우리가 잘 알 수 없는 북한과 그 속에 속해있는 구성원들 및 남과 북의 관계와 대립은 새로운 형태로 창조되었다.

 

※ 아래부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베를린'은 더 이상 남과 북의 대립이 중심축이 아니다. 오히려 북한 내부의 갈등이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간다. 남한의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와 북한 고스트 비밀요원 표종성(하정우), 그의 아내 연정희(전지현) 등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견고하게 구축된 체제와 시스템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다. 영화의 갈등구조를 이끌어가는 동명수(류승범)는 오로지 권력과 부를 좇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속해 있는 남과 북의 '부당거래'는 평생 빨갱이들을 혐오하다 못해 운전하면서 좌회전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정진수(한석규)로 하여금 시스템에 대한 작은 저항을 일으키게 한다.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질 위기에 처한 표종성(하정우)에게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그저 조용히 묻혀서 아무런 복수도 꿈꾸지 말고 먼지처럼, 보통사람처럼 지낼 것을 충고한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대사였다.) 하지만 표종성은 자신을 내다 버린 시스템에 도전을 선택한다. 시스템에 순응하다 도전을 선택하는 개인들의 변화가 영화 '베를린'에서 지켜봐야 할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배급한 CJ 엔터테인먼트는 1997년 '인샬라' (이영애, 최민수 주연)부터 숱한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도전해왔다.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영화로는 2009년의 '해운대' (1,147만명 동원)와 지난 겨울에 개봉한 '타워' (현재 516만명 동원 중)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지난 해 1,231만명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블록버스터로 분류되기에는 어중간하다고 볼 수 있다.) 숱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실패를 맛보았던 CJ 엔터테인먼트에게 '베를린'은 앞으로 블록버스터 영화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크레딧이 모여 최상의 결과물을 이끌어낸 영화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 필모그래피와 남북을 다룬 블록버스터 영화에 새로운 진보를 가져다준 작품으로 꼽힐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