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16. 23:28ㆍEntertainment BB/movie talk
198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늦은 밤,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충무로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모두가 불이 꺼져 있는 적막한 어둠 속에 홀로 휘황찬란하게 불을 밝히는 건물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건물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만큼 가득 메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불을 밝히던 그 건물은 당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규모(1920석, 70mm 대형 스크린)의 대한극장이었고, 당시 대한극장에서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로 '로보캅'이 개봉되었다.
사이보그 로보캅이 경찰차에서 내리는 모습의 포스터가 찬란히 불을 밝히는 가운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크리스마스 이브에 심야 개봉된 광경을 보면서 도대체 '로보캅'이 어떤 영화일까 하는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리고 며칠 후에 필자는 가족들과 함께 대한극장에서 '로보캅'을 관람했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필자는 당시로선 보기 힘들었던 광기어린 액션과 카타르시스에 소름 돋는 전율을 느끼면서 나왔다. 1987년 필자에게 시각적인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두 편의 영화가 있었는데 바로 홍콩 느와르의 서막을 알린 '영웅본색'과 단순한 액션을 넘어 물질 만능주의를 대놓고 풍자하면서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 영화 '로보캅'이었다.
당시만 해도 물질 만능주의를 비꼬는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받아들이고 이해할만한 연령대가 아니었기에 훗날 느낄 수 있었지만 폴 버호벤 감독 특유의 피비린내 나는 액션과 통쾌한 카타르시스는 필자의 뇌리에 '로보캅'의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키게 되었다.
1987년 12월 24일 심야에 개봉한 '로보캅'은 당시 겨울 특선 프로 중에 단연 흥행 선두를 질주했으며, 대한극장에서 45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지금으로 따지면 전국 500만을 넘어서는 대박이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수입, 배급한 지미필름은 창립 후 영화 '로보캅'으로 대박을 터뜨렸고, 이듬해 아카데미 9개 부문을 휩쓴 '마지막 황제'를 또 다시 겨울방학에 대한극장에 내걸게 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미필름은 영화배우 김지미씨가 설립한 영화사였다.)
1987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다. 수많은 희생과 역경을 이겨내고 민주화 운동이 결실을 보면서 모두의 숙원이었던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고, 민주주의 정착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하지만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의 승자는 다름 아닌 또 다른 군인 출신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민주화 운동의 결실은 '절반의 성공'으로 마감하게 되었다.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었던 '양金'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단일화에 실패한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1987년 당시 개봉한 '로보캅'의 시대적 배경은 1999년 디트로이트 였고, 1999년 디트로이트는 범죄와 무질서로 황폐화되어 있고, 거대 기업인 OCP는 자신들이 제작한 로봇 경찰을 통해 디트로이트를 장악하려는 음모를 꿈꾸게 된다. 물질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디트로이트의 모습은 영화 속에서 만큼 황폐화되지 못했지만 물질 만능주의는 점점 그 비중을 넓혀가고 있다.
1987년 이후 27년이 흘러 영화 '로보캅'이 새롭게 리메이크 되어 대중들에게 선을 보였다. 일단 27년 전과 지금을 비교하면 강산이 두 번 변해도 모자랄 만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영화와 관련된 부분만 살펴보면 27년 전 당시 극장가를 지배했던 대한극장은 대기업의 자본을 내세운 거대 영화 체인 CGV, 롯데시네마 등의 멀티플렉스에 밀리면서 거대한 단일 극장에서 11개관 짜리 멀티 플렉스로 변신했지만, 이전의 영광은 달콤한 추억 속으로만 묻어두게 되었다.
그리고 '로보캅'을 수입했던 지미필름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1988년 직배영화가 상륙한 이후 영화 배급 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한국영화도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준과 규모가 성장했다. 하지만 여러 개의 배급사들이 군웅할거를 이루던 1980년대의 충무로의 중심은 이제 CJ, 롯데, 쇼박스 등 거대 자본을 앞세운 배급사들이 독점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강우석 감독의 시네마서비스가 시장을 지배하던 시절이 오히려 그리워질만큼 대기업의 거대자본과 시스템 속에서 한국영화의 창의성은 소멸되어 가고 마치 아이돌 가수처럼 복제 양산되는 모습이 짙어지고 있는 아쉬운 상황이다.
지난 해 CJ, 롯데, 쇼박스 등의 거대 배급사 틈바구니를 헤집고, 한국영화 점유율 1위를 차지한 배급사 NEW의 선전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한국 영화의 건전한 발전에 큰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27년 전에 비해 지금 사회는 중산층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화되면서 부의 장벽은 점점 공고해지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서열이 정해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이야기로 묻혀지고 있다. 물질 만능주의는 심화되지만 정작 돈을 한창 벌어들여야 할 2030세대는 오히려 '88만원 세대'라 불리게 될만큼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다.
27년 만에 새롭게 탄생된 '로보캅'에 등장하는 세상도 물질 만능주의가 한결 팽배해지고 있다. OCP의 자회사인 옴니코프는 강력한 로봇 군인들을 전 세계에 투입하여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이려는 야욕을 꿈꾸고 있으며, 거대한 자본에 매수당한 미디어는 사실상 옴니코프의 나팔수 역할을 맡게 된다. 오리지널 '로보캅'에서 돋보였던 부분 중의 하나는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뉴스와 재치가 넘치는 광고 들이었다. 리메이크 버전에서는 영화 중간 삽입 뉴스가 뉴스 쇼의 형태로 버전 업이 되었고, 뉴스 쇼의 진행자로 사뮤엘 잭슨이라는 거물급 배우 기용을 통해 풍자 효과를 배가시켰다.
영화 오프닝 타이틀이 등장할 때 모처럼 웅장한 사운드의 오리지널 스코어가 등장하는데 잠시나마 27년 전 당시의 짜릿했던 전율이 느껴졌다. 영화의 전반적인 이야기의 중심은 로보캅의 탄생과정의 디테일과 배경, 로보캅으로 살아가게 되는 머피와 머피의 가족들간의 내면적인 고뇌에 모아져 있다. 심지어는 로보캅의 수트가 왜 블랙으로 바뀌게 되었는지도 묘사되는데, 영화 제작자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극중 등장인물의 대사를 빌려 명분을 만든 점이 이채롭다. 로보캅의 탄생과정의 디테일은 원작보다 한층 심도있게 그려졌으며, 원작에서 놓친 부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묘사하여 극의 리얼리티와 명분을 되살린 점이 원작과의 차별화 포인트이다.
다만 액션이 오리지널의 질펀하고 카타르시스 넘치는 부분이 부족한 점이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지만, 스토리의 디테일과 거물급 조연배우들(사뮤엘 잭슨, 게리 올드만, 마이클 키튼)의 안정된 연기력의 극의 긴장감을 잘 살려 놓는다. 딱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영화 엔딩 타이틀이 올라갈 때 오리지널 스코어를 한 번 더 들었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한 점이다.
영화 '로보캅'에서처럼 세상은 점점 물질 만능주의가 가치 판단의 절대적 기준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런 현상을 애써 부정하려 해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더욱 씁쓸해진다. 27년 뒤에 또 다른 '로보캅' 리메이크 버전이 등장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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