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에게 바라는 것은 '영웅본색'이 아닌 '축구'이다.

2014. 6. 24. 10:06Sports BB/축구라

728x90
반응형

6월 23일 새벽, 밤잠을 설치고 월요일 출근길에 대한 부담 속에서도 TV 중계 화면을 지켜봤던 국민들은 꽤나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가장 쉽다고 여긴 알제리한테 전반전에만 무려 3골을 허용하고, 3골을 내주는 동안 단 한 차례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한 충격적인 장면을 접하게 될 줄은 축구에 꽤나 전문적인 식견을 보유한 팬일지라도 쉽사리 예측 못했을 것이다.

 

경기가 끝난 직후 기성용의 인터뷰 소감처럼 꽤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역대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이 한 경기에서 기록한 최다 골이 2골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전반전 3-0의 스코어는 이미 승부의 추가 80% 이상 기울어졌다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5분 만에 분데스리가 소속의 영건 손흥민이 자신의 화려한 개인기를 통해 추격의 고삐를 당기는 만회골을 넣는 순간 2010년 아시안게임 이란과의 3,4위전 당시의 기적의 기운이 풍겨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게 하였다. 손흥민의 골은 역대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기록했던 골들 중 가장 개인기가 돋보이는 명품 골이었다.

 

그리고 구자철의 기습슈팅과 기성용의 벼락 중거리슛이 나올 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분위기 반전이 감지되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도 일순간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또 다시 알제리 공격수들의 짧은 패스와 현란한 개인기 앞에 대한민국 수비진은 속수무책으로 대응하며 4번째 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막판까지 반전의 기회를 노렸지만 구자철의 만회골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H조 상대팀들 중 가장 최약체로 여긴 알제리는 막상 접해보니 뛰어난 피지컬과 화려한 개인기 그리고 세밀한 패스 등 전반적인 플레이가 2002년 월드컵 당시의 터키를 연상하게 하였다. 또한 피지컬을 앞세운 저돌적인 역습은 우리가 가장 취약점을 보이는 상대인 이란의 플레이도 연상하게 하였다. 전통적으로 대한민국은 개인기량과 피지컬이 더해진 팀들에게 좀처럼 맥을 못추는 경향이 있다. 아시아에서 늘 이란에게 고전하는 것도 이란이 피지컬과 한 수 위의 개인기를 앞세워 공략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벨기에와 러시아라는 유럽권에서 결코 꿀리지 않는 강팀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네임 밸류가 떨어지는 알제리는 약체로 여겨지는 착시효과가 빚어졌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첫 경기 상대인 러시아 전에 사실상 올인했던 대표팀은 알제리의 공격 일변도 축구에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상대를 얕본 결과가 너무도 가혹한 대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패배를 접한 축구팬들은 이번 대표팀이 꾸려질 때부터 비난의 도마 위에 올랐던 홍명보 감독의 '의리축구'를 맹비난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번 월드컵이 시작하기 전부터 대표팀의 '엔트으리'는 논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러시아 전에서의 선전 덕분에 홍명보 감독의 '엔트으리' 논란은 수면 아래로 가라 앉는 듯 보였다. 그러나 알제리 전에서 그 동안 우리 대표팀이 보여준 온갖 악습이 종합 선물세트처럼 펼쳐지면서 비난의 수위는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난의 중심에는 2경기 동안 단 한 차례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했던 '스트라이커' 박주영이 자리하고 있었다.

 

박주영의 포지션은 엄연히 스트라이커이다. 스트라이커는 골을 넣어야 한다. 골을 넣지 못하더라도 동료에게 골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줘야 한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무대에 진출했던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은 강호 아르헨티나, 불가리아, 이탈리아를 상대로 무려(?) 4골이나 넣는 선전을 펼쳤다. 기존의 허정무, 최순호, 이태호, 박창선, 조광래, 김주성, 변병주, 정해원, 김종부 등 당시 아시아 최강의 스쿼드 멤버로 구성된 점도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월드컵을 앞두고 조국을 위해 대표팀의 빨간 유니폼을 입은 독일 분데스리가 전설의 스트라이커 '차붐' 차범근이 같이 뛰었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차범근의 인지도는 지금 월드컵에 비유하자면 3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통산 최다골 타이기록을 작성한 클로제를 훨씬 능가했으며, 타 대륙 선수로서 유럽무대를 휩쓴 디디에 드로그바(코트디부으라)의 카리스마와 인지도를 훨씬 뛰어넘는 공포의 존재였다. 그러다보니 각 팀의 수비수들은 차범근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될 수 밖에 없었고, 평균 2~3명의 수비수들이 사실상 그를 에워싸다시피 하였다. 차범근에게 쏠린 견제 덕분에 대한민국 대표팀의 다른 공격수들은 상대적으로 더 원활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차범근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참가한 멕시코 월드컵에서 명성에 걸맞게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상대 수비수들을 몰고 다니며 다른 공격수들에게 공간을 만들어 준 활약만으로도 그의 존재 가치는 빛을 발하였다.

 

1994월드컵 당시 사상 첫 1승의 제물로 여기던 볼리비아 전에서 대한민국은 추가 시간포함 100분에 가까운 접전 끝에 아쉽게도 0-0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비난의 중심에는 간판 스트라이커 황선홍이 자리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찬스 때마다 홈런에 가까운 볼을 남발하는 골 결정력 부족으로 팬들의 비난 세례는 절정에 달하였다. 그나마 마지막 경기인 독일 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골을 넣으면서 비난을 조금이나마 잠재울 수 있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박주영의 경우는 정말 특이하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전이 끝난 직후 홍명보 감독은 박주영에 대해 수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점을 칭찬했다. 그 동안 대한민국의 숱한 공격수들이 수비 가담에 적극적이지 못한 게으른 움직임으로 많은 비난에 시달려 온 점을 감안하면 박주영의 플레이는 헌신적인 것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60분을 뛰는 동안 공격수로서 슈팅을 단 한개도 기록하지 못한 점은 과연 그의 포지션이 스트라이커가 맞는지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러시아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박주영에 대한 의심과 비난의 목소리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최악의 졸전을 보인 알제리와의 전반전에서도 박주영은 슈팅을 단 한개도 기록하지 못하였다. 수비에 대한 적극적인 가담이라는 변명도 이미 3골이나 허용한 상황에 적용될 수 없었다. 그 동안 휴화산처럼 잠재해있던 박주영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알제리전 결과를 통해 절정에 달하고 있다.

 

박주영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이다. 그 동안 선배 스트라이커들이 월드컵에서 활약한 모습과 비교할 때 박주영은 더욱 초라해질 수 밖에 없다. 19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기대했던 골을 기록하지는 못했지만 명성만으로도 상대 수비수들에게 큰 압박감을 심어주고 수비수들을 몰고 다녔던 차범근,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숱하게 골 찬스를 날렸지만 역으로 골 찬스를 위한 움직임을 무수하게 만들어낸 황선홍의 사례를 보면 박주영의 포지션을 스트라이커라고 호칭하기도 민망할 정도이다.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황선홍과 동료로서 함께 참가했던 홍명보 감독은 숱한 비난에 시달리는 황선홍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을 것이고,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골을 넣으면서 일그러진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회복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단언컨대 이번 월드컵 마지막 경기가 될 가능성이 높은 벨기에전에서 박주영에게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줄 것이 분명하다.

 

홍명보 감독은 선수시절부터 굳은 뚝심과 믿음직한 플레이로 팬들에게 큰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감독으로서 홍명보는 의문부호이다. 선수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냉철한 시선으로 가장 최적의 조합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 감독의 의무인데 홍명보 감독은 이미 자신이 내세운 원칙마저 저버리면서 박주영에 대한 편애를 드러냈다.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에게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선수의 이름값과 관계없이 원칙을 앞세운 단호한 선수단 운영과 적절한 스킨십을 가미한 리더십 때문이었다. 확고한 리더십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의 고질병인 학연과 지연에 의한 대표선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이를 통해 최고의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이을용은 히딩크 감독이 아니었다면 단언컨대 지금의 자리에 올라설 수 없었을 것이고, 대표팀 승선에 의문부호만 가득했던 박지성도 히딩크 감독의 과감한 기용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축구 역사는 크게 뒷걸음질 쳤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벨기에전 결과에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벨기에의 전력을 대한민국이 넘어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둥근 공처럼 경기 외적인 변수와 당일 컨디션의 최적의 조합에 의해 의외의 기적을 거둘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다. 혹시라도 지금의 주전 멤버에서 조금의 변동도 없이 기적을 일으킨다 해도 걱정이다. 결국 자신의 고집과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한 홍명보 감독은 더욱 편협된 시선으로 대표팀을 이끌 명분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에 펼쳐질 아시안컵에서도 지금과 같은 주전 선발 방식을 고집한다면 대표팀에서 소외된 (특히 K리그) 선수들 사이에서 대표팀에 승선해야할 동기부여는 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대표팀에 들어간들 뻔한 결과가 펼쳐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올해 초 미국 전지훈련의 참혹한 실패사례를 목격했다. 선수와의 '의리'는 감독의 리더십을 위해 중요하지만 보다 대승적인 시선으로 대표팀을 운영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웅본색'이 아닌 '축구'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