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다듬어졌다면 '넘버3' 못지 않았을 영화 '세기말'

2014. 11. 28. 22:47Entertainment BB/movie 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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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여름 극장가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블랙 코미디 영화 광풍이 불었다. 다양한 캐릭터의 조폭, 주변인물, 그리고 검찰 등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풍자와 유머를 절묘하게 조합한 영화 '넘버3'였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한 송강호의 속사포 대사는 많은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너무 웃다 못해 눈물까지 나게 만들어서), '임춘애'와 '현정화'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송강호는 이 영화를 통해 충무로의 새로운 스타로 발돋움하는 발판을 만들게 되었다.

 

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환상의 호흡을 펼친 동국대 연영과 선후배 최민식과 한석규는 이 영화를 통해 찰진 호흡을 보였고, 주연배우 한석규는 충무로의 확실한 흥행 보증수표임을 입증하였다. 영화 '넘버3'의 힘은 캐릭터였다. 데뷔작에서 다양한 캐릭터를 자연스러운 에피소드로 연결한 쉽지 않은 작업을 어지간한 기성감독 못지 않은 노하우로 버무린 송능한 감독은 단번에 충무로 최고의 기대주로 등극하게 되었다.

2년 뒤 1999년, 본격적인 21세기를 앞두고 때아닌 '세기말' 광풍이 불어 닥쳤다. Y2K로 대표되는 컴퓨터 버그가 발생할 것이라는 괴소문은 새로운 세기를 앞둔 사람들의 설레임과 불안함을 압축시킨 사례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런 사회 트렌드를 포착한 송능한 감독은 '세기말'이라는 타이틀 하에 또 다시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켜 한바탕 에피소드를 펼쳐낸다. 송능한 감독의 의도는 세기가 바뀌는 시점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이 병들고 찌들어가는 세태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려 함이었다.

 

 

 

 

그런데 전작 '넘버3'와 다른 점은 영화의 분위기가 한층 어두워졌다는 점이다. 제목이 '세기말'이다 보니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컴플렉스와 내면에 숨겨둔 타락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이 영화는 1999년 연말대목을 맞이하여 과감하게(?) 개봉했는데 당시 주연배우들 (김갑수, 이재은, 차승원 등)의 인지도가 '넘버3'의 한석규, 최민식에 비하면 한창 부족한 편이어서 개봉 초기부터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는데 실패하였다.

 

하지만 송능한 감독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통한 옴니버스식 에피소드 구성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된다. 그리고 이 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을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통해 감칠맛나게 뱉어내고, 타락한 인물들의 군상을 묘사하는 영상미는 15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고 믿겨지지 않을 만큼 세련된 감각을 과시한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배우들 (이재은, 임지선)은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베드신 연기를 펼치는데 지금 만들어지는 영화에서도 쉽게 보기 힘들 정도로 높은 수위를 보여주고 있다. 송능한 감독은 영화 평론가부터 교수, 그리고 졸부들까지 이 사회의 이른바 '있는 사람들'로 대접받는 계층 들을 강렬한 톤의 대사와 영상으로 신랄하게 '까대고' 있다. 송능한 감독은 이 영화의 흥행이 잘 안될 경우 이민을 가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힐 정도로 흥행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 타이밍이 너무도 엇박자였다. 훈훈함을 기대하는 연말에 시종일관 유머보다는 어두운 분위기가 지배하는 이 영화를 관객들이 선택하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영화의 완성도는 지금 봐도 촌스럽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깔끔하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송능한 감독의 재기발랄한 연출력을 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판치는 한국영화 제작 흐름을 감안하면 '세기말'과 같은 감독의 작가의식이 과감하게 투영된 영화를 보기는 더더욱 힘들어진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P.S. 1999년 당시 이 영화를 개봉했던 종로 3가의 단성사는 지금도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유령건물이 되어가고 있다. 마치 영화 '세기말'의 분위기와 흡사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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